여행/2019` 일본_교토

[해외여행/일본] 여자 혼자 교토겨울여행 1일, 윤동주를 찾아서 _ 키요미즈데라 / 산넨자카,니넨자카 / 호칸지 / 도시샤대학 / 시모가모경찰서 / 윤동주 유혼의 비 (윤동주, 송몽규 하숙집)

방랑쪼 2020. 1. 11. 00:21

여자 혼자 교토겨울여행 1일, 윤동주를 찾아서

키요미즈데라 / 산넨자카,니넨자카 / 호칸지 / 도시샤대학 / 시모가모경찰서 / 윤동주 유혼의 비 (윤동주, 송몽규 하숙집)

 

 

도쿄에서 교토로 가는 티켓 찍는 걸 잊어서 올 때 티켓으로 대체!

 

 

도쿄 시나가와에서 8시 출발 열차 예매,

조금 일찍 도착해서 그 전 열차인 7시 50분 열차 탑승, 어짜피 자유석이라서 오는거 아무거나 탑승해도 상관없음!

※ 신칸센 TIP

열차 티켓은 2매, 신칸센특급권, 승차권

탑승권에는 유효기간이 적혀있는데 옛날에는 기차가 느려서 하루만에 도착할 수 었었기 때문에 중간역에서 내려서 갈아타거나 할 수 있도록 하는 형태였고 그 형식이 그대로 남아있는거라고 한다.

왜 2장인지 궁금했는데, 역무원한테 물어보니 원래 2장이란다.. 왜 2장이라니깐 원래라니.. -_-

승차권은 출발지 JR 아무역에서 승차해도 이 승차권으로 탑승가능하다. 
ex) JR오오모리역 - JR시나가와 역까지 이 승차권으로 탑승 가능

 

※ 신칸센 자유석 TIP

대부분 1~3호 열차는 자유석 자리! 

 

배낭하나 둘러매고 가는데 가방이 무거워서; 가방걸이 하나가 있다면 좋았을 걸 싶었다;

통로 쪽 구멍에 걸어두면 좋았을걸. 괜히 두고와서;

 

10시 교토역 도착!

게스트하우스 tu casa가 걸어서 그렇게 멀지 않아서 슬슬 구경도 할 겸 교토역에서 걸어서 숙소까지!

 

 

아기자기 귀여운 게스트하우스 tu casa
낮에 짐풀고 나가느라 정신없어서 돌아와서 찍은 사진!

 

숙소는 작고 아담한 느낌, 게스트하우스답게 공용 공간도 따뜻한 느낌 :)

오늘은 시간이 부족하니, 근처 관광지와 도시샤대학에 있는 윤동주 시비 등을 찾아가는 목표로!

 

교토여행 1일 루트!

 

 

 

 

 

카모강, 날은 흐리지만 분위기는 좋다

 

 

카모강

정지용 시인의 시, 압천

바로 여기 교토 카모강!

고등학교 때 본 시 같은데, 

그래도 정지용 시인이라고 하면 향수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

 



압천(鴨川) - 정지용



압천(鴨川) 십리(十里)ㅅ벌에
해는 저물어……저물어……

날이 날마다 님 보내기
목이 자졌다……보내기

찬 모래알 쥐어짜는 찬 사람의 마음,
쥐어짜라. 바수어라. 시원치도 않어라.

여뀌풀 욱어진 보내기
뜸부기 홀어멈 울음 울고,

제비 한 쌍 떠ㅅ다,
비맞이 춤을 추어.

수박 냄새 품어오는 저녁 물바람.
오렌지 껍질 씹는 젊은 나그네의 시름.

압천(鴨川) 십리(十里)ㅅ벌에
해가 저물어……저물어……


 

 

 

산넨자카 쪽이 아닌 묘지가 있는 뒤쪽으로 들어가서 처음 보이는 키요미즈데라의 모습

 

 

 

키요미즈데라(청수사)

숙소 주인 청년이 숙소와 가깝다고 여기를 먼저 가는게 어떻냐고 추천해서 먼저 가기로 결정!

흐리던 하늘이 도착할즈음 맑게 개었다.

파란 하늘에 잘어울리는 건축물,

청수사 입장료가 있는데 아직 공사중이라 안에 들어가도 별로 볼 것이 없다는 블로그 글을 봐서

400엔 내지 않고 주변만 한바퀴 휘 돌아보고 내려왔다.

 

 

계단에서 바라보기, 니넨자카로 가는 길
스타벅스

 

 

니넨자카, 산넨자카

여기서 넘어지면 2년 3년안에 죽는다고, 하는 언덕. 

조심히 다니라는 뜻으로 이런 말들을 했겠지.

중국분들이 너무너무너무 많아서 진짜 어디 하나 들리지 않고 그냥 슝슝슝 내려왔다.

 

 

호칸지절, 목재를 태워 처리하는 일본 전통 스타일이 잘 나타나있는 건축물인것 같다
어두워서 핸드폰 카메라가 잘 잡지 못하지만, 유자인지 노랑과 잘어울린다

 

호칸지절

정말 일본스럽다 라고 생각한 절, 여기도 사람이 너무너무 많았지만

분위기가 괜찮아서 여러번 뒤돌아보며 사진찍었던 곳.

 

 

혼케오와리야 소바집 가는길, 카모강의 어느 다리를 건너며,
本家尾張屋
메뉴 다양, 

 

혼케오와리야 소바집

버스를 타기 뭐해서 그냥 걸어서 간 소바집, 꽤 걸렸지만 동네 구경하며 걸었다.

비가 오락가락 날이 추워서 따뜻한 온소바로

 

혼케오와리야에서 버스를 도시샤 대학까지 버스를 탈까하다가, 한 30분만 걸으면 되길래 다시 또 걷기로!

가는길에 교토고쇼가 있길래 그 길로 살짝 걸으면서 가도 좋을 것 같아서 이 루트로 가기로

왕이 살던 거처는 토요일에 휴무라 그냥 넓다란 자갈길만 걷다가 나왔다

 

 

 

 

 

윤동주 시비

 

 

 

윤동주의 서시

 

 

 

 

 

 

정지용의 압천

 

 

 

누군가 가져오신 옥천 생가의 흙과 물이 귀엽게 자리잡고 있다

 

 

 

 

도시샤 대학교 윤동주 시비, 정지용 시비

도시샤 대학교 예배당을 바라보고 바로 오른쪽 길로 꺾으면 바로 보이는 시비,

맨처음에는 큰 연못을 찾으려고 헤매다가 다시 돌아나오면서 발견

 

일본에서 윤동주와 정지용의 시를 만나니 마음이 무겁고도 기뻤다.

시비 방명록에 흔적을 남기고 돌아나왔다.

 

 

도시샤 대학에서 나와 시모가모 경찰서 가는 길에 다시 만나는 압천

 

 

 

데마치야나기역에서 강변을 따라 북쪽으로 걸어 올라가면 경찰서가 나온다

 

 

시모가모 경찰서

1943년 7월 14일 윤동주 시인이 하숙집에서 독립운동을 했다는 죄목으로 체포되어 온 경찰서.

여기서 구금된 후 교토 지방 재판소에서 판결을 받고 후쿠오카로 이송되었다고 한다.

얼마나 무섭고, 두려웠을지... 가슴이 아프다.

 

 

해가 지고 있어서 부랴부랴 걸어 하숙집터로 이동

 

 

 

 

 

윤동주 하숙집 터 (윤동주 유혼의 비) : 교토 조형 예술 대학 (京都造形芸術大学 高原校舎)

시모가모 경찰서를 끼고 돌아 20분정도 걸으면 도착한다.

윤동주, 송몽규가 거닐었을지도 모를 거리를 천천히 걸으며 눈에 담았다.

 

 

더보기

윤동주는 1943년 7월 14일 교토에서 사상탄압 전문 특별고등경찰 형사에게 체포 당해 시모가모(下鴨) 경찰서 유치장에 감금되었다. 독립운동을 했다는 죄목이었다. 송몽규가 중심이고, 윤동주와 고희욱은 동조자였다. 백인준, 마츠야마, 마츠바라, 장성언 등도 함께 체포되었으나 검사국으로 넘겨진 사람은 송몽규, 윤동주, 고희욱이고, 기소되어 실형을 언도 받아 복역한 사람은 송몽규와 윤동주뿐이었다. 둘은 북간도 용정의 윤동주 집에서 함께 자란 고종사촌이었다. 윤동주가 도쿄의 릿쿄(立敎)대에 입학해 한 학기가 지난 1942년 10월 1일 도시샤(同志社)대 문학부 문화학과 영어영문학 전공(選科ㆍ선과)으로 옮긴 것은 교토제국대에 송몽규가 재학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윤동주는 교토에 간 지 10개월 만에 일제의 마수에 걸렸다.

윤동주는 1944년 3월 31일 교토지방재판소에서 미결구류일수 120일을 산입한 징역 2년을 선고 받고 후쿠오카형무소에 수감되었다. 죄목은 치안유지법 위반이었다. 후쿠오카형무소는 일본형무소 중에서 한반도와 가장 가까운데다가, 주로 독립운동 관계자를 수용하여 악명이 높았다. 윤동주는 독방에서 투망 뜨기, 봉투 붙이기, 목장갑 코 꿰기 등 노역을 하는 한편, 한 달에 한 번 일본어로 엽서를 쓰거나 영일(英日) 대조 성서를 읽는 것으로 소일했다. 건장했던 그는 이름 모를 주사를 계속 맞은 끝에 1945년 2월 16일 외마디 비명을 지르고 운명했다. 해방을 6개월, 만기 출소를 9개월 반 앞둔 시점이었다. 향년 27 남짓, 너무나 아까운 청춘 아닌가! 그가 맞은 주사액은 당시 규슈제국대에서 실험하고 있던 혈장 대용 생리식염수였다는 설이 있다.

 

윤동주의 장례식은 1945년 3월 6일 용정 집 앞뜰에서 거행되었다. 아버지가 신경(新京, 장춘), 안동(安東, 단동)을 경유하여 후쿠오카까지 와서 시체를 인수하여 가져가 화장하고 납골했다. 용정중앙장로교회 문재린 목사가 장례를 주관하고, 연희전문학교 동인지 ‘문우’에 실린 윤동주의 시 ‘우물속의 자화상’ ‘새로운 길’을 낭독했다. 1945년 6월 14일 뒷동산 무덤 앞에 ‘시인윤동주지비(詩人尹東柱之碑)’를 세웠다.

 

윤동주의 하숙은 1936년에 목조로 지은 2층인데, 교토제국대와 도시샤대 학생 70명이 입주했다. 찾아가 보니, 지금은 그 자리에 철골조 건물인 교토예술단기대 교사가 서 있었다. 윤동주는 하숙에서 도시샤대까지 약 3.5㎞를 매일 걸어 다녔다. 가모가와(鴨川), 고쇼(御所), 상국사(相國寺) 등이 어우러진 아늑하고 유려한 길을 오가며 그는 넓고 깊은 시상에 잠겼다. 그가 정지용의 시 ‘압천(鴨川)’을 걸작이라고 평한 것을 보면 강변의 오리 한 마리, 풀 한 포기도 그냥 지나치지 않았던 것 같다.

도시샤대의 학사처리는 엉성하고 느슨했다. 한국이 해방되고 윤동주가 옥사한지 3년도 훨씬 지난 1948년 12월 24일 교수회의는 장기결석과 학비미납으로 그를 제명했다. 그렇지만 도시샤대는 그의 사후 50년 만에 캠퍼스의 가장 좋은 곳에 그의 ‘서시’를 새긴 시비를 세웠다. 수위가 시비를 찾는 방문객에게 나눠주는 ‘윤동주시비건립취지서’에 이런 구절이 있다.

 

‘전쟁과 침략이라고 하는, 입에 담기조차 무서운 말이, 성전(聖戰) 혹은 협화(協和)라는 이름으로 미화되어,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무고한 사람들을 죽음으로 내몰았고, 빛나는 미래를 꿈꾸고 있던 수많은 청년들의 귀중한 생명을 앗아 갔습니다.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기를” 하고 읊었던 시인 윤동주도 그 가운데 한 사람이었습니다. 시인이 배웠던 도시샤의 설립자 니지마 조(新島襄)는 ‘양심이 전신에 충만한 대장부들이 궐기할’ 것을 말했습니다만, 시인의 생전 모습이 바로 그러했습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 가는 것을 사랑해야지”라고 되뇌며, 양심이 명하는 바에 따라 그는 살았습니다. 그 치열한 삶의 모습을 우리는 흉내조차 낼 수 없습니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잘못을 부끄러워하는 것이 아니라, ‘같은 잘못을 반복하는 어리석음을 저지르지 않는, 혹은 저지르지 않게 하기’ 위해서도, 시인의 말을 가슴에 새기고 싶은 것입니다.’

 

[정재정의 독사만필(讀史漫筆)] 정지용, 윤동주, 도시샤대학 ② 

https://www.hankookilbo.com/News/Read/201805091005570262?NClass=HJ02

 

 

 

 

송몽규 하숙집 터 추정

블로그를 찾아보며 대충 추정하는 송몽규의 집 터

윤동주 하숙집터와 5분정도 거리. 

 

 

 

 

날도 춥고, 비도 오락가락, 바람도 심했던 교토 1일

저녁은 간단하게 샌드위치로 마무리.

 

여행테마로 잡았던 윤동주의 흔적을 찾는 여행 첫날, 순조롭게 마무리 할 수 있었음에 감사한다.

그들이 걸었던 길을 걷고 싶어서 걸었던 골목 골목, 가슴이 뜨거워지고 뭉클해지는 순간들이었다.

 

 

 

 

 

 

 

  교토 여행경비    
1 숙박 게스트하우스 tu casa 2박 (여성전용 도미토리 4인실) 7,000
       
2 교통 시나가와 - 교토 신칸센 자유석 13,320
    키타시라카와오구라초 - 시조카와라마치 버스 230
       
3 식비 혼케오와리야 덴뿌라소바 1,925
    패밀리마트 샌드위치 빵 398
       
TOTAL   22,8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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